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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내 가족에 투영된 비극, 소방관은 링 위에 올랐다 (소방관, 사람이먼저다, 소방관파이터, 소방관건강, 소방관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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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두려웠어요. 사망사고였거든요.” 12년 전 첫 출동 현장은 끔찍했다. 거대 석산이었는데 발파 천공작업을 하던 중 붕괴했다고 한다. 초짜 소방관은 참혹한 광경 앞에서 작아졌다. 저 안에 사람이 있을 텐데, 난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가슴이 쿵쾅대는 순간 돌무더기를 파고들어가는 동료의 모습이 보였다.

2018년 5월 18일. 상대는 일본 선수이고 리벤지 매치였다. 이종격투기를 시작한 이후로 가장 떨렸다. 소방복을 입고 등장해 각 잡힌 경례를 했다. 출동 신고가 없다면 이 경기를 보고 있겠지, 동료들 생각이 났다. ‘나는 강인한 대한민국 소방관이다’ 주문을 외웠고 1라운드 벨소리가 울린지 얼마 되지 않아 통쾌한 승리를 맛봤다.

충북소방본부 특수 구조단 소속 신동국(39) 소방관의 ‘부캐’ 생활은 흥미로웠다. 삶에 찾아온 위기를 극복하려 시작했지만 지금은 전국에 있는 소방 동료들을 위해 뛴다. 그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지난 8일 그에게 직접 들었다.

사고 현장서 얼어붙은 나, 소방관이 되기로 했다.

신 소방관의 20대는 남달랐다. 도전하는 삶이 좋아 육군 특전사에 입대했고 이라크 파병까지 다녀왔다. 5년 3개월의 군목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소방관이 된 건 아주 우연한 기회에서였다.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길을 가는데 교통사고를 목격했다. 분명 위급한 상황인데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누구보다 강한 정신력과 체력을 가졌다고 자부한 그가 머뭇거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자책하고 있는데 소방대원들이 도착하더라고요. 운전자를 구해 옮기는 모습을 보고 느꼈죠. 아 소방관이 돼야겠다, 소방관이 돼서 생명을 구해야겠다고요. 소방관이 되고 보니 느껴요. 촌각을 다투는 상황과 우리 손에서 누군가의 생사가 오간다는 사실을요. 그 역할에 대해 책임감과 자긍심을 느끼죠.”

현장에서 멋진 활약을 펼치고 돌아올 때면 그는 매번 성취감에 젖었다고 했다. 대형 화재를 진압했을 때도 그랬고 고독사나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등진 사람들을 떠나보낼 때도 그랬다. 늘 ‘나는 멋진 소방관이고 어디서 뭘 하든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5년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갔는데,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찾아왔다.

참혹한 현장 앞에 무너져 내렸다

마음을 굳게 먹고 담담하려 애썼지만, 이 장면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상처와 슬픔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무너져버렸다. 스스로를 멋진 소방관이라고 했던 건 철저한 자기방어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어요. 영화에도 나오고 소방 교육 때도 항상 들었죠. 하지만 처음에는 관심 없었어요. 난 강했고 늘 도전해왔으니까. 나약하지 않으니까”라고 회상했다. 비현실적인 공간에 들어가 시신을 수습하는 시간. 그 공기가 익숙해질 수록 자신이 우울감에 젖어 들고 있다는 걸 그땐 몰랐다.

시작은 불면증과 사소한 강박이었다. 그저 ‘오늘 밤 유독 잠이 안 오네’ ‘내가 요새 과민한가 보다’ 하고 넘겨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 눈을 감으면 사람이 죽어가던 비극적 현장이 떠올랐고, 그 끔찍한 모습들이 가족에게 투영되는 악몽을 꿨다. 우울증·불면증약을 처방받았지만 효과는 잠깐이었다. 예민함이 계속될수록 가족·동료들과의 관계 역시 소원해져 갔다.

그러다가 술에 의존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자랑스러워했던 소방관이라는 직업도 출퇴근하는 직장 정도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무력감을 도무지 이겨낼 수가 없었다. 그때 신 소방관을 자극한 건 “다른 사람 같다”는 아내의 말이었다. 오랜 연애 끝에 결혼한 아내는 그의 활기찬 청년 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항상 도전하고 열정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는데 왜 이렇게 변했냐는 아내의 다그침이 그를 움직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내가 너무 멀리 왔구나.’

위기를 극복하게 한 ‘소방관 파이터’ 의 삶

이종격투기는 무너진 삶을 일으켰다. 36세. 격투기 선수라면 이미 은퇴를 고려할 나이였지만 그는 프로 진출까지 성공했다. 신 소방관은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제가 그동안 해이해져 있었던 거잖아요. 재출발의 원동력을 찾아야 했고 저 자신을 꾸짖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이종격투기 선수가 된 뒤 링 위에 오를 땐 항상 소방복을 입는다. 그는 여기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소개했다.

“전국에 계신 소방관분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예요. 늘 위험한 현장에서 땀 흘리는 분들이거든요. 잠깐이라도 재미있는 이벤트를 선물해주고 싶어요. 같은 소방 동료가 격투기 경기를 한다고 하면 여기저기 모여 저를 지켜볼 거고, 그때만큼이라도 우리는 모두 한마음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싶어요. 승리했을 때는 그 기쁨을 나눠 가질 수도 있고요. 두 번째는 국민께 믿음직스러운 소방관의 모습을 보여드리려는 거예요. 소방관으로서 두려움 없이, 물러섬 없이 상대방과 대등하게 경기하는 투지. 승패보다 그게 더 중요해요.”

그의 진심이 닿은 걸까. 하루는 경기 직전 누군가 선수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종이가방을 하나 건네고는 이내 사라졌는데 그 안에는 소방장갑과 고글이 담겨있었다. 신 소방관은 그때 함께 받은 편지를 다시 한번 떠올리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세월호 실종자 수색을 위해 출동한 소방헬기가 추락한 사고가 있었어요. 당시 기장님이셨던 고(故) 정성철 소방용 아드님이었는데, 아버지가 생전에 쓰시던 걸 제게 전하며 그러셨어요. 이 유품이 수호신 역할을 해줄 거라고 앞으로 더 많은 생명을 구해달라고….”

“소방동료들이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신 소방관은 경기 후 얻는 대전료(파이트머니) 전액을 기부한다. 그 계기를 물었더니 “생각처럼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하며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그는 “제가 소방공무원이지만 월급은 저희 가족 부양할 정도예요. 누군가에게 단돈 10만원이라도 쉽게 기부할 여건은 안 되거든요. 그런데 대회에 출전하면서 부수입이 생겼고 그 정도는 기부해도 제가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어요.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맺은 결실이고 그게 누군가에게 전달된다는 것 자체가 기뻐요”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질병으로 투병하거나 사망한 소방관과 유족에게 대전료를 전달하고 있다. 대부분 공무상 재해 인정을 받지 못해 보상금이나 복지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다. 지난 3월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 최전방이었던 대구의 한 요양원과 소상공인들에게 마스크를 기부했다. 최근 달력 제작을 통한 기부활동에도 모델로 동참했다.

소방관들이 남모르게 겪는 고통과 이를 이겨내기 위해 선택한 파이터의 삶. 이 도전적인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저 국민 여러분을 가족처럼 내 목숨처럼 지키려 노력한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소방 동료분들이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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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연 기자, 촬영·편집=최민석 김다영 기자 jym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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